존재에 대해 다시 묻는다는 것
우리는 일상 속에서 ‘존재한다’는 말을 너무도 쉽게 사용합니다. “나는 존재한다”, “사람은 존재한다”, “세상은 존재한다”는 식의 표현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만, 과연 우리는 ‘존재’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요?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이 놓지 않았던 핵심적인 물음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이 질문을 가장 철저하게, 그리고 가장 급진적으로 다시 제기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입니다.
하이데거는 그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기존의 존재론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존재 자체를 시간의 구조 속에서 다시 사유하고자 합니다. 그는 “존재는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열어주는 가능성의 장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존재는 아직-되지 않은 가능성이다”라고 할 수 있는 이 문장은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 사유를 압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놀라운 인식을 요구합니다.
존재는 ‘거기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사유는 존재를 고정된 실체로 보는 전통적 관점에서 벗어나, 그것을 미래를 향한 열림,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되어가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글에서는 이 도발적인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풀어가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제시된 존재 개념, 시간성,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구조를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또한 독자가 일상 속에서 느끼는 자아와 시간, 죽음, 가능성이라는 주제를 철학적으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1. 존재와 존재자
철학사를 되돌아보면 ‘존재’라는 개념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존재에 대한 물음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수천 년에 걸친 사유의 흐름 속에서 ‘존재’는 점차 실체나 사물, 속성, 신적 개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어 왔고, 그 본래의 문제 제기는 희미해졌습니다.
하이데거는 이런 철학적 전통을 ‘존재 망각(Seinsvergessenheit)’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철학자들이 ‘존재자(Seiendes)’, 즉 사물이나 인간과 같이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를 해왔지만, 그 존재자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지, 즉 ‘존재(Sein)’ 자체에 대한 사유는 간과해 왔다고 비판합니다.
존재자(Seiendes)란 무엇인가?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물건, 동물, 인간, 행성 등은 모두 존재자입니다. 이것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이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은 철학의 핵심을 찌르는 급진적인 물음입니다. 존재자들은 존재하지만, 그 ‘존재함’의 방식, 즉 존재의 의미 자체는 쉽게 간과됩니다. 하이데거는 이 지점을 철저하게 해부하고자 합니다.
🔍 존재(Sein)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게 있어 존재(Sein)는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입니다. 쉽게 말해, 존재자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배경적인 구조 혹은 토대입니다. 하지만 이 존재는 눈에 보이거나 구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놓치게 되는 보이지 않는 조건입니다.
예를 들어, 책상은 존재자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책상이 존재한다”는 그 말의 존재론적 의미를 좀처럼 묻지 않습니다.
즉, 책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무엇이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가? 이 질문이 바로 하이데거의 철학적 출발점입니다.
🧠 왜 이 구분이 중요한가?
이 구분은 “존재는 아직-되지 않은 가능성이다”라는 명제를 해석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입니다. 만약 우리가 ‘존재’를 어떤 실체로 오해한다면, 그것이 되기(becoming)의 가능성이나 시간성(Temporalität)과 연결된다는 하이데거의 핵심 주장을 오독하게 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고정되고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해석되고 구성되어야 하는 열린 구조로 이해합니다. 존재자는 특정 시점에서 ‘이미 있음’을 가리키지만, 존재는 그러한 존재자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지평으로, 본질적으로 미완성과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2. 현존재(Dasein)
“존재는 아직-되지 않은 가능성이다”라는 문장의 철학적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하이데거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인간 존재를 특별히 지칭하는 용어인 현존재(Dasein)를 제시합니다.
‘Dasein’은 독일어로는 ‘거기에 있음’을 뜻하지만, 하이데거 철학에서는 훨씬 더 깊은 개념적 함의를 가집니다. 그는 인간을 다른 존재자들과 구분되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자로 설정하며, 이 점에서 현존재는 하이데거 존재론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 인간은 존재자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다른 사물이나 동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존재자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특수성을 강조합니다. 인간만이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기 때문입니다:
-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 자신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다.
- 자신의 존재를 해석하고, 형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자, 즉 존재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존재자로 정의합니다. 이러한 존재자가 바로 ‘현존재’입니다.
🔍 현존재의 본질은 ‘존재 이해’에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현존재는 존재자 가운데,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을 수 있는 존재자이며, 그 존재 방식은 항상 존재 이해에 기반한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존재 이해(Seinsverständnis)’입니다. 현존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방식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존재자입니다. 예컨대 인간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기 존재를 해석해 나갑니다.
이때 이 ‘존재 이해’는 가벼운 사고 작용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사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어떤 삶을 선택하고 어떤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통해 자기 존재를 구성하고 의미화하기 때문입니다.
🔍 현존재는 언제나 ‘자기 앞에 놓인 존재’
하이데거가 현존재를 특별히 규정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항상 자기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이미 다 알고 있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의 존재입니다.
이 점에서 현존재는 존재 자체를 열어가는 구조이며, 따라서 ‘존재는 아직-되지 않은 가능성이다’라는 명제가 가장 먼저 적용되는 대상입니다. 인간은 항상 이미 주어진 상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려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구성해 나갑니다.
3. 시간성과 존재
“존재는 아직-되지 않은 가능성이다”라는 명제를 하이데거의 존재론 안에서 해석하려면, 반드시 시간성과 존재의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시간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개념이며, 더 나아가 시간 그 자체가 존재를 드러내는 지평입니다.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할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선형적 흐름입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물리적 또는 연대기적 시간(Chronos)에 만족하지 않고, 존재를 구성하는 실존적 시간성(Temporalität)을 철학의 핵심으로 제시합니다.
하이데거의 시간 비판: 시계 시간의 한계
전통적으로 시간은 외부 세계의 변화와 연속성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뉴턴적 시간 개념에 따르면, 시간은 사건들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흘러가는 균일하고 객관적인 배경입니다. 이러한 시계 시간(clock time)은 물리학이나 과학에서는 유용할 수 있지만, 하이데거는 이것이 존재를 이해하는 데는 근본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묻습니다:
“존재란 무엇인가를 알려면,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현존재와 시간: 실존적 시간성(Temporalität)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수학적 계산 대상이 아니라, 현존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로 봅니다. 그는 시간성을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 과거(Gewesenheit) : 현존재는 언제나 과거에 영향을 받습니다. 출생, 문화, 언어, 기억 등은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배경’을 형성합니다.
- 현재(Gegenwart) :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현재는 정지된 점이 아니라, 과거의 영향과 미래의 기대가 얽혀 있는 과정입니다.
- 미래(Zukünftigkeit) : 하이데거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 차원입니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미래로 투사하는 존재, 즉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
이 세 가지 시간 차원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상호 얽히며 현존재의 실존적 구조를 형성합니다. 하이데거는 이 시간 구조를 ‘시간성(Temporalität)’이라 부릅니다. 시간성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고 가능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시간성과 존재의 드러남
하이데거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바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어떤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시간의 구조를 통해 가능해집니다.
존재는 그 자체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열리는 구조입니다.
즉, 존재는 과거에 규정되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자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이처럼 시간의 구조 없이는 절대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존재는 아직-되지 않은 가능성이다”의 시간적 의미
이제 이 문장을 시간성과 연결해서 다시 바라봅시다.
- 존재는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 구성되는 열림의 장입니다.
- 인간은 미래를 향한 자기 투사를 통해, 즉 ‘아직 되지 않은 자신’을 목표로 삼음으로써 존재를 실현합니다.
- 따라서 존재는 언제나 미래에 놓인 가능성, 되기(becoming)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시간성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말 뒤에 숨어 있는 깊은 실존적 역학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시간성의 구조를 통해, 존재는 항상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항상 구성 중인, 항상 열려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4.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
“존재는 아직-되지 않은 가능성이다”라는 하이데거의 사유는 인간 존재의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조건인 ‘죽음’에 이르러 절정을 맞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가능성이라는 점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바로 죽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생물학적인 생의 종결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로, 현존재의 가능성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입니다.
죽음: 인간 실존의 불가피한 가능성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현존재가 자기 존재를 이해하고 실현해 가는 가장 고유한 방식입니다.
- 죽음은 모든 가능성을 종결짓는 절대적 한계이면서도,
- 동시에 존재가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자극하는 근원적 가능성입니다.
즉,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자기 삶을 전면적으로 마주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숙고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진정성(Eigentlichkeit)’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음에 대한 도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하이데거는 이런 태도를 ‘비진정성(Unauthenticity)’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사회, 타인, 일상적 관습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은폐한 채 살아가며,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가능성을 외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나’가 아닌 ‘누군가’이다.”
이러한 태도는 존재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진정한 존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비진정성을 벗어나,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그 가능성 속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Sein-zum-Tode: 죽음을 향한 존재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 개념을 통해,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 사건이 아니라, 항상 현재 속에서 현존재를 규정하는 실존적 구조임을 밝힙니다.
- 죽음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미래의 가능성입니다.
- 죽음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삶의 매 순간을 진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합니다.
- 죽음을 피하지 않고 직시할 때, 인간은 자신이 아직 되지 않은 가능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구성하고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필수적인 가능성입니다.
존재는 ‘죽음을 향한 가능성’ 속에서 드러난다
이제 "존재는 아직-되지 않은 가능성이다"라는 명제를 다시 되새겨 봅시다. 이 문장은 인간이 미래 지향적이라는 점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존재를 자각하고, 그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자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진정한 존재는 ‘이미 주어진 정체성’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나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구성해 가는 가능성 구조입니다. 바로 그 이유로, 존재는 완결된 상태가 아닌, 열려 있고,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며, 언제나 구성 중인 가능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5. 존재는 가능성이다 - 열린 미래로서의 존재
지금까지 우리는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가 어떤 실체나 사물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실현되어 가는 가능성이라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마지막 항목에서는 이러한 논의들을 종합하여, “존재는 아직-되지 않은 가능성이다”라는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철학적 핵심을 정리하고 확장해 보겠습니다.
존재는 '이미 있음'이 아니라 '될 수 있음'
전통적으로 존재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상태, 즉 ‘이미 거기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를 완성된 실체나 정태적 실존이 아닌, 끊임없이 구성되고 실현되어가는 실존적 가능성으로 새롭게 해석합니다.
현존재는 항상 자신을 미래로 투사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주어진 삶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이 무엇이 될지를 선택하고, 실현하며, 실패하기도 하는 실존적 존재자입니다. 이 점에서 존재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항상 구성 중인 실천적 과정입니다.
가능성으로서의 존재: 되기의 철학
하이데거는 존재를 가능성의 지평에서 이해함으로써, ‘되기(becoming)’의 철학을 전개합니다. 이는 니체나 들뢰즈와 같은 후기 현대철학자들의 사유와도 연결되지만, 하이데거는 이를 실존적 구조와 연결시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유로 정교화합니다.
- 존재는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의해 정의됨
- 가능성은 선택의 여지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
- 되기는 시간 속에서 드러나고 실현되는 존재의 형식
이러한 사유는 존재를 닫힌 실체가 아닌 열린 운동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존재는 결코 완성되지 않으며, 항상 미완이며, 미래를 향해 계속해서 열려 있는 상태입니다.
“아직-되지 않음”의 철학적 의미
“존재는 아직-되지 않은 가능성이다”에서 핵심은 ‘아직(noch nicht)’이라는 시간성의 표현입니다. 이 ‘아직’은 시간적으로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가 항상 구성 중이며, 본질적으로 미완의 상태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아직-되지 않음’은 다음을 함축합니다:
- 존재는 항상 잠재적인 상태로 남아 있음
-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가능성을 선택하고 거부하며,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어감
- 우리는 이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
즉, 존재는 과정이며 관계이며 시간적 운동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가능성의 구조를 통해, 인간 존재가 가진 실존적 자유와 책임을 강조합니다.
존재와 자유: 가능성의 실천
하이데거가 존재를 가능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론적인 사유만이 아닙니다. 그는 이를 통해 삶의 방식, 즉 존재의 실천적 윤리를 제시합니다.
- 존재는 가능성이다 →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선택할 수 있다
- 인간은 자유롭다 → 그 자유는 책임을 요구한다
-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 시간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다
이러한 통찰은 실존주의적 윤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를 결정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존재를 드러냅니다.
존재는 ‘열림’이며, 우리는 그 가능성 속에 있다
“존재는 아직-되지 않은 가능성이다.” 이 문장은 철학적 은유나 문학적 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던진 가장 급진적이고 실존적인 질문의 핵심입니다. 즉,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이데거는 존재를 그냥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존재를 항상 열려 있고, 구성되고 있으며, 가능성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운동적인 실체로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사유의 전환은 고전 형이상학이 구축해 온 정태적 존재론을 해체하며, 존재 자체를 시간적·실존적·되기(becoming)의 구조로 전환시켰습니다.
인간 존재로서의 현존재, 그리고 실존적 책임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Dasein)입니다. 우리는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문제 삼고, 이해하고, 구성해 갈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이 점에서 인간은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즉, ‘아직 되지 않은 무엇’으로서 존재합니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철학적 통찰에 이르게 합니다:
- 나는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매 순간 선택하며 살아간다.
- 나의 존재는 열려 있고, 그것은 미래를 향해 던져진 가능성이다.
- 따라서 존재는 가능성 그 자체이며, 나는 그 가능성을 살아가는 실존이다.
죽음을 통한 진정한 존재의 자각
죽음은 이 존재론적 가능성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라는 개념은, 우리가 비로소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삶의 모든 순간이 선택이며 가능성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존재, 즉 비진정한 일상성에서 벗어난 실존적 삶을 살도록 요구합니다. 진정한 존재는 바로, 자신의 삶을 가능성으로 받아들이고, 그 가능성을 책임감 있게 실현해가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문장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정체성의 혼란, 자동화와 기술화된 삶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철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다시 물음을 던집니다:
“너는 아직 되지 않은 존재이며,
너의 존재는 너의 선택과 시간 속에서 구성되고 있다.
그러니 너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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