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정의의 또 다른 이름이다.”
— 엘리 위젤(Elie Wiesel)
이 문장은 단지 과거를 떠올리는 감상의 차원을 넘어, 인간이 어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곧 윤리적 정체성과 공동체의 도덕 질서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환기한다.
기억은 정지된 상태의 정보가 아니라, 도덕적 판단과 실천의 시공간을 형성하는 능동적 구조이며, 이 기억이 정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고백, 반성, 그리고 책임이 동반되어야 한다.
오늘날, 도덕적 정당성과 정체성을 동시에 상실한 채 흔들리고 있는 한국 보수주의에게 이 문장이 던지는 물음은 더욱 뼈아프다. 정치 세력이 다시 길을 찾기 위해선 정책의 수정보다 먼저, 자신이 어떤 기억을 억압했고, 어떤 책임을 회피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기억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질서다.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가 말한 것처럼, 기억은 집단 속에서 공유되고, 특정한 해석과 의미 부여 과정을 통해 정체성의 핵심 구성 요소가 된다. 그리고 기억은 권력과 분리되지 않는다.
어떤 사건을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또 어떤 상처를 ‘잊혀져야 할 것’으로 처리할 것인가는 결국 공동체 내 권력의 작동 방식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한국 보수가 지나온 길은 ‘승리의 기억’에는 익숙했지만, ‘실패의 기억’에는 침묵해왔다.
그러나 진정한 윤리적 정치란 영광의 기억보다 실책의 기억을 고백하고 공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러한 철학적 전환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의 도덕적 프레임 이론과, 러셀 커크(Russell Kirk),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벤 샤피로(Ben Shapiro)를 비롯한 미국 보수주의 사상가들의 통찰, 그리고 한국 보수의 역사적 궤적을 함께 성찰해야 한다.
레이코프는 『도덕의 정치』에서 정치적 성향이 단순한 정책 선호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내면화된 도덕적 세계관(moral worldview)에 기초한다고 보았다. 그는 보수주의를 ‘엄한 아버지(strict father)’, 진보주의를 ‘자애로운 부모(nurturant parent)’의 프레임으로 설명하며, 이 모델들이 국가의 역할, 교육관, 시장 윤리, 시민의 책임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적 태도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책 리뷰] 도덕의 정치
오늘 리뷰할 책은 조금 오래된 책으로. 최근 재출간 된 책이다. 재출간되어진 책은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내용은 동일하지 않을까 한다. 도덕의 정치, 도덕, 정치를 말하다 조지 레이코프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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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는 오랫동안 ‘엄한 아버지’의 프레임 속에서 질서, 효율, 규율, 자기 책임을 중시해왔다. 이는 해방 이후 반공주의, 산업화 중심 국가주의, 유교적 권위주의와 맞물리며 제도화되었고, 1960~80년대에는 국가 성장의 동력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다양성과 참여의 가치를 중심으로 시민의식이 확대되면서, 기존 보수는 세대, 젠더, 지역, 기후 등의 감수성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고립되어 갔다. 특히 부패와 특권 구조, 엘리트주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은 보수가 더 이상 도덕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강화시켰다.
[책 리뷰] 레이건 일레븐 - 인류 역사가 지켜온 11가지 원칙
"레이건 일레븐- 인류 역사가 지켜 11가지 원칙"Ronald Reagan의 정치 철학과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저자인 정치학 교수인 Kengor 박사는 레이건 보수주의를 정의하는 11가지 원칙을 제시하면서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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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미국 보수주의 사상가들이 제시한 윤리적 모델은 한국 보수가 다시 자신의 철학을 재구성하는 데 유의미한 기초가 된다. 커크는 보수주의란 영속하는 도덕 질서에 대한 믿음이며, 공동체의 전통과 인간 본성의 일관성을 신뢰하고 급변이 아니라 점진적 변화를 중시하는 사유라 말한다. 레이건은 이 철학을 국민과의 정서적 연결과 실천의 언어로 구현해낸 지도자였다. 그는 자율성과 자유, 시장의 유연성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엘리트의 권력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낙관주의, 유머, 진정성을 바탕으로 국민과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한국 보수도 국민과 단절된 엘리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면, 정책보다 먼저 언어와 태도를 혁신해야 한다.
[책 리뷰]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 - 러셀커크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보수의 정신'이라는 러셀 커크(Russell Kirk)의 책을 읽기 전에 가볍게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종의 정통 보수주의 입문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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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샤피로는 현대의 ‘문화 전쟁’ 속에서 보수주의의 철학적 선명성과 도덕적 확신을 강조하며, 진보적 상대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에 맞서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자유, 책임, 서구 전통의 윤리를 방어하는 강단 있는 논객이지만, 그의 담론은 때로는 공감보다는 대립을, 품격보다는 전투를 불러일으킨다. 한국 보수가 그의 지적 정밀성과 원칙성을 참고하되, 그것을 공동체적 언어와 품격 있는 설득의 구조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책 리뷰] 역사의 오른편 옳은편 (THE RIGHT SIDE OF HISTORY)
우연히 유튜브 강연을 보다가 벤 샤피로(Ben Shapiro)라는 미국의 보수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알게 되어 사게 된 책이다. 누군가는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에 있어서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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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는 결코 하나의 흐름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보수, 신보수주의, 공동체주의 보수, 종교적 보수주의 등 다양한 내부 분파들이 있으며, 이들의 복합적 결합이 시대마다 다른 모습의 보수로 현실화되었다.
한국 보수는 이 다양성을 경시하기보다, 공존 가능한 보수의 윤리적 조화 모델을 탐색해야 한다. 진보의 프레임 일부 특히 배려와 공공성,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감수성을 수용하면서도, 절제와 책임, 자율성과 전통이라는 보수의 미덕을 함께 구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념의 변절이 아닌 시대를 포용하는 철학의 갱신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이론과 철학, 역사와 감각의 복원을 기반으로 보수주의가 새로이 걸어야 할 길은 실천의 언어로 다음과 같이 구체화될 수 있다.
첫째, 실패를 직면하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 용기는 윤리 정치의 출발점이다.
둘째, 기존 프레임은 냉혹한 통제에서 신뢰와 품격 있는 지도력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자율성과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는 설계가 필요하다.
셋째, 진보와의 관계는 경쟁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대안적 질서로 설정되어야 한다.
넷째, 자유는 공동체적 책임과 공공성과 연결될 때만이 지속 가능한 가치임을 인식해야 한다.
다섯째, 보수는 다가올 문제들 기후위기, 통일 이후의 사회 통합, 세대 간 단절, 기술의 윤리적 문제 등에 대한 책임 있는 입장을 설계할 수 있는 준비된 정치로 거듭나야 한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억 위에 어떤 정의를 세울 것인가?”라는 위젤의 물음은, 지금 한국 보수에게 가장 본질적인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보수주의는 과거를 보존하는 정치가 아니라, 기억을 윤리로, 윤리를 공동체의 미래로 연결하는 철학적 실천의 이름이어야 하며, 한국 보수가 이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정파의 부활이 아닌, 한국 사회 전체가 더 품격 있고 지속 가능한 도덕적 공동체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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