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기술의 눈부신 진보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인공지능은 자율적으로 학습하며 인간의 판단을 모방하고, 로봇은 공장과 병원, 일상생활의 영역까지 진입해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메타버스와 같은 개념은 더 이상 미래의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기술이 인류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 것이라 기대한다.
분명히 기술은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고, 삶을 편리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이 같은 진보를 ‘무조건적인 진보’로 바라보는 시각은 위험하다.
기술은 가치를 담는 ‘그릇’일 뿐이며,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인류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효율성과 속도, 정확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로 남게 되는가?
기술의 발전은 곧 인간의 진보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인간성을 밀어내는 또 다른 위협일 뿐인가?
이와 같은 질문은 기술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고민해야 할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넘어서 ‘기술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평가하고 대체하는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우리는 기술의 최첨단을 논하기 전에, 기술의 중심에 인간이 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기술 진보가 만든 ‘편리한 사회’, 그러나 ‘불안한 인간’
기술은 분명 인간의 삶을 더 편리하게 만들었다.
스마트폰 하나로 은행 업무, 쇼핑, 업무, 소통이 가능해졌고, 인공지능은 의료 영상 진단부터 법률 자문, 심지어 예술 창작까지 수행하며 인간의 능력을 보완하거나 대체하고 있다.
이렇게 기술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던 비효율과 제약을 극복하게 해주는 도구로 기능해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과 불안이 존재한다. 기술은 우리에게 편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인간의 역할과 존재 가치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자리와 노동의 관점에서 기술은 인간에게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자동화 기술은 단순한 반복 노동뿐 아니라 회계사, 번역가, 교사 등 전문 직종마저 위협하고 있으며, 곧 인간이 ‘기술보다 못한 존재’라는 인식을 확대시킨다.
이런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성과, 속도, 효율이라는 기술적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역설적으로 '쓸모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 존재로 내몰리는 것이다.
또한 기술이 만들어내는 ‘속도 중심 사회’는 인간 본연의 리듬과 감정, 관계를 희생시키고 있다. 알고리즘은 감정을 계산으로 환원하고, 빠른 응답과 결과를 요구하며 ‘느림’과 ‘서툼’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느린 존재다. 실수하며 성장하고, 관계를 통해 의미를 찾으며, 감정을 기반으로 선택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과 기술이 요구하는 속도, 정확성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기술은 인간의 노동과 감정을 효율성의 프레임 안에 가두고 있다.
우리는 이제 질문해야 한다.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은 더 나아지는가?’가 아니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기술 중심 사회에서 인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술이 인간을 도우려던 도구에서 인간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기준’으로 변모하면서, 우리는 이제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인간은 무엇으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기술이 요구하는 속도, 효율, 정확성에 부합하지 않는 인간은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인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 존재의 정의 자체를 바꾸려는 지금, 우리는 인간의 의미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현대 기술사회가 인간의 비판적 사고를 무디게 만들고, 다원성과 창의성을 억제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기술이 사회를 통제하고 사람들을 획일화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즉, 기술이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러한 관점은 기술이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사유 범위와 선택지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또한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사회에서 널리 인용되는 『피로사회』라는 단어를 통해 오늘날의 인간은 더 이상 외부의 억압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가 아니라, 성과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그는 현대인이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의 강박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세우며, ‘더 빨리, 더 잘’이라는 자기 압박에 시달린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기술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는커녕, 보이지 않는 성과의 감옥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기술 중심 사회에서 인간은 점차 ‘감정과 관계를 맺는 주체’에서 ‘성과를 내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기술로 측정될 수 없으며, 인간은 단지 기계보다 느리고 덜 정확하다는 이유만으로 가치 없는 존재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술이 아닌 인간 본연의 특성 공감, 윤리, 창의력을 중심으로 인간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기술이 아닌 ‘가치’ 중심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기술은 스스로 방향을 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어떻게 설계하고, 누구를 위해 사용하며, 어떤 사회적 가치를 담느냐에 따라 기술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기술의 발전을 멈출 수 없다면, 우리는 그 기술이 구현할 미래가 인간 중심적인가를 먼저 따져야 한다.
결국 핵심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인간의 철학과 가치관에 달려 있다.
첫째,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 채용 과정에서 특정 집단에게 불리한 결과를 반복적으로 낳는다면, 기술이 인간의 편견을 복제하고 확대하는 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기술은 의도하지 않아도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화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을 만들고 적용할 때 ‘효율’만이 아니라 ‘공정성’, ‘책임성’, ‘투명성’ 같은 사회적 가치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둘째, 포용성과 형평성이 기술 설계의 전면에 배치되어야 한다.
누구나 기술 발전의 혜택을 공평하게 누릴 수 있도록 디지털 격차 해소, 정보 접근성 보장, 교육 기회의 평등이 필수적이다.
또한 고령자, 장애인, 저소득층과 같은 사회적 약자도 소외되지 않는 ‘디지털 포용사회’를 설계해야 한다.
기술은 일부 엘리트나 거대 자본의 수단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공공재가 되어야 한다.
셋째, 인간 고유의 특성인 감정, 윤리, 공감, 창의력은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오히려 이러한 요소들은 기술 시대에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돌봄 노동, 교육, 상담과 같은 분야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관계와 공감이 핵심이다. 이처럼 기술이 못 하는 것을 인간이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단순히 ‘기술을 못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라, ‘기술 너머의 가치를 실현하는 존재’가 된다.
결국 기술 발전의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은 ‘가치’여야 한다.
기술을 통한 미래 설계는 인간이 중심에 있을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우리 사회는 기술 윤리와 사회적 합의, 민주적 통제를 기반으로 한 ‘인간 중심 설계(Human-Centered Design)’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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