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고개를 들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사유와 여백의 회복을 위하여 ―
언제부터 우리는 하늘을 잃어버렸을까.
도심의 아침은 늘 비슷한 풍경으로 시작된다. 땅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들,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된 눈동자, 이어폰을 낀 채 어디론가 바쁘게 이동하는 무표정한 얼굴들. 우리는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있다. ‘머무름’이 없는 일상, ‘멈춤’이 불편한 세계.
우리는 지금, 고개를 들지 않는 삶에 익숙해진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이라는 사각형 화면은 이제 단순한 정보 기기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를 압축한 창이며, 관계 맺는 유일한 외부이자 내면을 대신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손안의 세계는 편리하고 신속하지만, 그만큼 깊이를 잃게 만든다. 그 화면 안에는 풍경은 있지만 바람은 없고, 대화는 있지만 침묵은 없다. 감정은 있지만 여운은 없고, 관계는 있지만 존재의 흔적은 희미하다.
과거의 나는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던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공을 차다 말고 하늘을 보며 멍하니 있던 오후, 겨울의 회색 하늘 아래 흩날리던 첫눈을 바라보며 느꼈던 낯선 전율, 유난히 밝은 별이 떠 있던 여름밤의 불면. 그 모든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이었다.
이유도 모르고 목이 메던 순간, 별의 빛에 눈시울이 젖던 이유는 단지 예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세계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 말하자면 존재의 자리를 실감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얼마나 자주 하늘을 바라보는가. 아니, 나는 스스로 고개를 드는 일조차 잊은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하늘을 보는 습관이 아니라, 그 속에서 피어나던 감정, 침묵을 견디는 마음, 고요 속에서 나를 마주하는 용기, 생각이 자라던 여백의 시간일 것이다.
빅토르 프랭클은 말했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라고. 그는 절망의 수용소 안에서도 의미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늘을 보며,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다. 의미는 혼돈 속에서도 피어난다. 그러나 그 의미는 타인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침묵을 우리는 지금, 잃어가고 있다.
AI가 글을 쓰고, 영상과 음악을 편집하며, 채팅을 대신하는 시대. 디지털 기계는 어느새 인간이 해오던 창조의 영역에 손을 대고 있다. 물론 그 기술은 경이롭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인간 고유의 감정과 경험을 어디에 둘 것인가?
감정은 순간적이지만, 그 깊이는 영원에 다가간다.
기술은 빠르지만, 감정은 천천히 다가온다. 기억은 데이터가 아니며, 사유는 연산이 아니다.
우리가 기술에 기대는 순간, 감정은 가볍게 소비되고, 사유는 짧은 반응으로 대체된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현대인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자신을 잃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이며,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거리의 어느 벤치에서 혼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단순한 관찰이 아닌, 삶과 감정과 기억이 스며든 ‘응시’였다. 그것은 소유할 수 없는 시선이자, 사라져가고 있는 인간다운 태도였다.
그 노인이 하늘을 바라보던 모습은 오히려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저런 시선을 잃었는가.

시몬 베유는 ‘주의’란 곧 사랑의 형태라고 했다. 하늘을 바라보는 일, 그건 단지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삶, 그리고 나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너무 적은 것을 주의 깊게 본다.
하늘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하늘을 ‘본다’는 것은 단지 시각의 문제가 아니다. 그 하늘에 마음을 열 수 있는지, 감정의 통로가 닫혀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시선이 살아 있는지를 묻는 문제다.
가끔은 생각한다.
기술이 우리를 대신해 많은 것을 해주는 이 시대에, 우리가 정말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AI가 인간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것 아닐까. 말보다 빠른 반응, 생각 없는 댓글, 공유된 감정과는 다른 나만의 감정. 그것들이 사라질 때, 인간은 얼마나 얕은 존재가 되는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짧은 시간. 그것은 속도에 저항하는 행위이자, 자기 자신과 재회하는 기도이다. 하늘을 바라보다 보면 알 수 있다. 바람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구름이 어떻게 흩어지는지, 그 너머의 공간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그 하늘을 바라보는 나라는 존재가, 단지 누군가의 프로필 사진이나 알고리즘의 일부가 아닌,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존재다.
그 사실은 너무나 당연해서 오히려 잊고 살아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는 것은, 시선의 물리적 전환을 넘어 삶의 태도 전체를 바꾸는 일이다. 하늘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고개를 들지 않는다면,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존재하지만 인식되지 않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잃어가는 감정이고 사유이며, 인간다움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존재를 물음으로써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존재를 묻기보다는 기능을 따지고, 의미를 찾기보다는 속도를 중시하며 살아간다. 존재를 묻는 일은 멈춤을 필요로 한다.
생각의 정지, 감정의 정숙,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식의 여백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여백은 지금, 상품화된 콘텐츠에 의해 빼앗기고 있다. 짧고 강렬한 콘텐츠는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낚아채고, 감정의 여운을 지우며, 사유의 연결을 차단한다. 사고를 이어가기 전에 다음 장면이 튀어나오고,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효과음이 울린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잃고 있는 ‘인간의 시간’이다.
마르틴 부버는 “존재로서의 타자와의 만남”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타인을 ‘그것’으로 취급하는 순간, 관계는 죽고, 삶은 도구화된다고 경고했다. 오늘의 우리는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그것’으로 소비하고 있다.
‘나’는 이제 하나의 브랜드이고, SNS 피드에 의해 정의되며, 타인의 반응으로 존재를 확인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측정될 수 없는 존재다.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타인을, 그리고 나 자신을 다시 ‘너’로 호명하는 일이다. 그것은 존재가 존재를 응시하는 가장 고요한 순간이자, 잊혀졌던 관계의 회복이다.

고개를 드는 순간, 우리는 다시 인간이 된다.
그것은 시선의 전환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의식의 전환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던, 그러나 늘 그 자리에 있었던 ‘하늘’을 보는 행위는, 결국 나의 내면을 되돌아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고개를 돌려 빛을 향해 눈을 뜨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고개를 드는 일은, 단지 하늘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인간이며, 무엇이 삶인가를 다시 묻는 시작이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은 실천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한다고 보았다.
생각하는 인간은 행동하는 존재이며, 사유는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야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물음 앞에 어떤 실천을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멈춤’이다. 가장 멀리 가는 사람은 가장 자주 멈춰 선 사람이라고, 기리야마 아이코는 말했다. 멈추지 않으면 방향을 잃는다. 우리는 지금, 너무 바쁘게 ‘어디론가’ 가고 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스스로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곧 삶의 속도에 저항하는 행위이며, 존재의 방향을 다시 묻는 용기이다. 그것은 의식의 정화이고, 감정의 정돈이며, 사유의 공간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단 10초의 시간 속에, 우리가 잃어버렸던 많은 것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 그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존재 전체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 연습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잠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그 아래 선 나 자신을 느껴보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인간의 시간’이다. 연결되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 말이 없어도 좋다. 하늘은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며,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다시 그 존재를 인식하고, 고개를 들기를 기다릴 뿐이다.
엘리 위젤은 “기억은 정의의 또 다른 이름이다”라고 했다.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기억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감정, 우리가 다시 살아내야 할 인간다움의 기록이다. 인간다움이란, 단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하늘이라는 거울 속에 비로소 떠오른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오늘, 하늘을 올려다보았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과연,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AI가 감정을 흉내 내는 시대에, 진짜 감정을 느끼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고개를 들어야 한다.
하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푸른 너머에는, 잊혔던 사유가 있고, 기억이 있고, 질문이 있고,
무엇보다도,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한 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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