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품지 못하는 사회에 드리우는 물음표 – 잃어버린 광장의 침묵
한때 우리는 거리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의 주인’임을 외쳤고, 그 외침은 제도를 움직이고, 권력을 바꾸었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로 우리 곁에 도달했다.
그러나 2025년 대한민국의 풍경을 들여다보면, 그 민주주의는 점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정치권은 연일 극단적 대립으로 얼룩지고, 강연장은 분열된 진영의 확성기가 되었으며, 소셜미디어 속 공론장은 혐오와 조롱이 일상화된 언어의 전장으로 변질됐다.
민주주의는 살아 있으되, '살아 있음의 조건'은 위태롭다.
우리는 지금, 과연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소모하고 있는가?
민주주의를 이해하려면, ‘선거로 권력을 바꾸는 체제’라는 표면을 넘어 그 내면의 철학과 원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인간 존엄에 대한 신념’ 위에 세워진 정치적 질서다.
존 롤스(John Rawls)는 『정의론』에서 “민주사회란 서로 다른 도덕적 관점이 공존할 수 있는 ‘합리적 다원주의’를 전제로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같은 생각을 강요하는 체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틀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착각한다.
다수결을 통해 결론을 내렸다면 그것이 곧 ‘정의’라고 믿고, 선거에서 이기면 ‘내가 옳다’는 확신에 빠진다.
하지만 정치학자 베르너 파첼(Werner Patzelt)이 경고했듯,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시작일 뿐, 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는, 패자의 권리까지 지켜내는 과정에 있다.
승자의 독점, 패자의 침묵
오늘날 한국 정치의 가장 뼈아픈 위기는, 다수가 곧 도덕적 우월성을 가진다는 오만에서 비롯된다.
권력을 쥐었다는 사실이 상대를 누를 정당성으로 간주되며, 협상과 타협은 ‘약함’으로 폄하된다.
이로 인해 정치의 공간은 공존의 무대가 아닌 투쟁의 전선으로 전락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플랫폼과 SNS는 이러한 구도를 더욱 강화한다.
알고리즘은 유사한 의견을 가진 이들을 묶어 ‘확증 편향’의 세계에 가두고, 이견은 ‘가짜뉴스’나 ‘적폐’로 낙인찍힌다.
언론학자 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이 지적했듯, “인터넷은 민주주의의 도구인 동시에, 분열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이로 인해 공론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정치적 중도나 비판적 지지의 목소리는 극단의 사이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고, 대화의 여지는 오직 싸움의 각도에서만 이해된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시스템이 아니라, 태도의 붕괴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친 풍경을 어떻게 넘어서야 할까?
정치는 본질적으로 갈등을 내포한 영역이지만, 민주주의는 그 갈등을 폭력 없이 다루는 문명의 방식이다. 다시말해, 민주주의란 ‘합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정치학자 요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민주주의는 경쟁하는 엘리트 간의 권력교체 방식”이라고 말했지만, 현대 민주주의는 그보다 더 깊은 수준의 시민적 책임을 요구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참여 민주주의’이며, 단순한 투표의 행위가 아닌 시민의 토론, 감정의 절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태도까지 포괄한다.
공존은 이러한 태도의 총합이다. 공존은 타협이 아니라, 관점의 경계를 넓히는 윤리적 선택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현대 사회를 ‘액체 근대’라고 했듯, 고정된 진리나 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더욱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민주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다름을 품는 용기’가 남긴 질문
민주주의는 단지 제도와 절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사회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한 집합적 성찰의 태도다.
우리는 지금 다시 물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싸움인가? 아니면, 다름을 품는 용기인가?
민주주의는 ‘싸울 자유’를 허락하지만, ‘싸우지 않을 자유’ 또한 보장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틀린 사람’이 아닌 ‘함께 살아가야 할 시민’으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정치적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존속’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정파가 아닌, 공존의 문화, 대화의 습관, 타인의 진실에 대한 경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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