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며, 그 핵심을 담은 사자성어가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말 그대로 ‘처지를 바꿔서 생각한다’는 의미를 가진 이 표현은 배려와 이해의 가치를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역지사지가 언제나 공정하고 균형 있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역지사지를 강요받는다.
공감은 소중한 가치지만, 그것이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요구될 때, 역지사지는 더 이상 배려가 아니라 억압의 도구가 될 뿐이다.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내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봐. 나도 윗선에서 압박을 받는다고"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직원의 고충에는 무관심할 때, 역지사지는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일방적인 요구가 된다.
고객이 직원에게 "내가 네 입장이었으면 기분이 어땠겠냐"고 따지면서도, 직원의 근무 환경은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공감이 아닌 강요에 가깝다.
사회적 관계에서 역지사지는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요구된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서비스업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는 약자가 강자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역지사지가 가진 본래의 의미와는 다른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것이 한쪽만을 향할 때 공감과 배려의 균형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역지사지는 더 이상 모두가 함께 실천해야 할 가치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강요되는 부담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역지사지는 정말로 올바르게 실천되고 있을까?
그리고 진정한 배려와 공감이란 무엇일까?
공감은 왜 약자의 몫이 되는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 이 말이 가장 많이 들리는 곳은 어디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관계에서 힘이 없는 사람들이 더 자주 요구받는 것 같다.
직장에서는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서비스업에서는 고객이 직원에게 역지사지를 강요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역지사지, 또는 공감이라는 것이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도구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엄마 아빠도 힘들어. 너도 부모가 되어 보면 이해할 거야"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녀의 감정과 입장은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역지사지는 종종 강자보다는 약자에게 더 많이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공감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요구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배려가 아니지 않을까?
역지사지의 이면과 실천
역지사지는 상호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조직 내에서, 가정에서, 심지어 사회 구조 속에서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강자는 약자에게 공감을 강요하지만, 스스로는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
역지사지의 일방적 적용은 단순한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반복되어 왔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 유교 사회에서는 충(忠)과 효(孝)를 강요하면서, 백성이 왕을 이해하고, 자식이 부모를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안정적인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공감을 강요한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역지사지는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이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진정한 공감이란 단순히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동반될 때 의미가 있다.
공감은 상호적이어야 한다.
"네가 내 입장이었다면 어땠겠느냐?"라고 묻는 것보다,
"나는 네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되묻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역지사지는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강자 모두를 위한 공정한 원칙이 될 수 있다.
학자들도 공감의 과잉과 불균형이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경남대학교 심리학과 김태훈 교수는 ‘과잉 공감이 혐오를 부른다’는 연구를 통해, 특정한 집단에게만 공감이 강요될 때 오히려 불만과 갈등이 심화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공감이 일방적으로 요구될 때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이 될 수 있다.
결국, 진정한 역지사지는 모두가 함께 실천하는 문화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일방적인 공감의 요구는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며, 공감은 사회 전체의 균형을 맞추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강요가 아닌 원칙으로 자리 잡으려면
우리는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배려와 공감의 미덕으로 배우지만, 현실에서는 이 말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더 많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회적 약자나 힘이 적은 사람들이 공감을 강요받고, 강자는 역지사지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역지사지를 진정한 배려와 공감의 원칙으로 자리 잡게 할 수 있을까?
첫째, 역지사지가 일방적으로 적용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공감과 배려는 누군가에게만 강요될 때 오히려 불균형과 억압을 초래할 수 있다. 역지사지는 누구나 실천해야 하는 가치이며, 힘 있는 사람들 또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조직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공감은 쌍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공감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진정한 공감이란 단순히 “네가 내 입장이었다면 어땠겠냐?”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네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상대의 입장에 공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공감을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가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공감이 아닌 감정적 요구에 불과하다.
셋째, 배려와 공감은 사회 전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문화여야 한다.
공감과 배려는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만의 의무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실천해야 하는 가치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시스템 역시 공정성을 갖추어야 한다. 기업에서는 상사가 부하 직원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고객과 서비스업 종사자 간의 관계에서도 서로의 상황을 고려하는 태도가 자리 잡아야 한다.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가 상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 역지사지는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배려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결국, 역지사지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요구되는 희생이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건강한 원칙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누가 역지사지를 해야 하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삶에 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은 평등하지만 선택은 그렇지 않다 (0) | 2025.04.02 |
---|---|
지식은 계승 위에 진보한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기 (0) | 2025.03.28 |
좋아하는 게 없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느낄 때 (0) | 2025.03.10 |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는가? (0) | 2025.03.09 |
부부란, 손을 맞잡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 (0) | 2025.02.11 |